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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교수 ② 구약 안식일과 신약 주일의 (불)연속성 Ezra Son 201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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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교수 ② 구약 안식일과 신약 주일의 (불)연속성

2015/02/18 (수) 23:24 ㆍ추천: 0    

미국의 한인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과연 주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주일에 마켓에서 장을 보고, 백화점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혹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해 아무런 꺼리낌이 없는가? 아니면 부담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의식은 주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으면 해결된다. 이 기사는 주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워싱턴한인목회연구원(원장 김범수 목사)은 2015년 신년 목회자 세미나와 부흥성회를 "이민 목회와 치유"라는 주제로 1월 26일부터 28일까지 메시야장로교회에서 열었다. 주강사인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총신대학교 교수)는 "주일성수"에 대해 강의를 이어나갔다. 이 기사는 강의의 두 번째 내용으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연속성을 강조한 청교도들의 입장, 그리고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가 하는 내용이다.

첫 번째 기사의 종교개혁자의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불연속성 입장과는 다른 청교도들의 연속성 입장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김남준 교수는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전통을 이어받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수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적인 자세는 상징적이다.

한국교회의 이런 주일성수에 대한 혼란 속에 김남준 교수는 주일을 안식일 보다 모르는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 주일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주일성수에 대한 강제적인 규제보다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주일이 주일되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김남준 총신대학교 교수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청교도들의 입장-연속성 강조


청교도들과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개혁 신학자들은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주일제도가 신학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지금 구속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보여주었고, 그리스도가 그 그림자를 따라서 실체로 직접 오셨고, 그래서 구약이 신약에서 성취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성취된 것들이 우주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다. 그런데 안식일에 대해 청교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신 안식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종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종말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의 차이가 나타난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안식일의 계명을 언약백성이 하나님께 언약 백성답게 살기위해 연약한 육체를 제어하기위해 노동을 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경배하는 것에 헌신하는 그 날이라는 좁은 생각을 뛰어넘어서 온 인류가 따라야 할 자연법적인 규범이라고 본 것이다. 그것에서 견해차이가 나온다. 이것은 보다 깊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의 이런 독특한 생각은 두 가지의 역사적인 문맥을 고려하면서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배경은 이유는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43년부터 5년간 회의를 하면서 작성했다. 그때가 영국의 역사에서 전통적인 농업에서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가기 전에 공장제 가내수공업을 들어가는 시점이다. 영국은 당시에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 농촌은 가난하고 농업을 주업으로 할 수가 없어서 남는 많은 인구들이 농업이 아니라 면화나 양털산업으로 몰려들었다. 그것들을 생산해서 무역을 통해 파는 일에 종사했다. 당시에 노동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규제가 없으니 시장에 의해 노동가격이 결정된다. 돈을 조금만 주어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많으니 노동조건이 악화된다. 그래서 16시간씩 근로를 하는 상황이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율법인 안식일을 엄격하게 계승함으로 국민복지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청교도에게 주일시장 통행금지령이라는 것이 있었다. 주일에는 시장을 지나가면 안된다. 사람들이 물건을 안사며 주일에는 시장에 문을 닫으라고 압력을 가한다. 공장에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면 일할 수밖에 없지만, 사장이 그리스도인이고 그것을 안지키면 교회에서 치리를 받는다고 하면 사장 한사람 때문에 수백 명의 공장직원들이 쉬게 된다. 직원들이 쉬면 교회에 나온다. 그 당시에는 교회를 안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형식적으로 나마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두번째 배경은 제임스 1세의 포고령이다. 왕이 청교도 위정자들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을 순시하다가 그곳 주민으로 부터 탄원서를 받는다. 그 지역은 청교도 위정자들이 지배하고 있어서 주일에는 놀지 못하고 스포츠도 못하게 한다며 이것을 풀어달라고 했다. 쉬는 날이라고는 주일밖에 없는데 이날 운동도 하고 좀 놀고 싶다는 것. 그런데 제임스 1세는 스코트랜드에서 청교도에게 들볶이다가 내려온 사람이기에 청교도들이 세력이 커지고 그들 뜻대로 나라가 움직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고령을 내린다. 처음에는 일부 지역만 허락했다가 다음해에는 모든 백성들이 지키도록 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엄격한 신앙생활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비중생자들과 비회심자 등 교회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이제 왕의 포고령에 힘을 얻어 뭉쳐서 교회의 지시에 따르는 대신 왕명을 따라야 한다고 반발하고 뛰쳐나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이 정치적으로 유연한 자세로 물러나면 신앙자체를 양보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정치적인 상황이 되었다. 사실 청교도들이 이런 미묘한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양보할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특히 청교도들은 당시에 스코트랜드에서의 엄청난 박해, 잉글랜드에서의 엄청난 억압을 보면서 배교에 노이로제가 걸려있다. 정치적인 억압 속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배교하는 현실들을 보았기에 청교도들에게 배교는 너무 무서운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배교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입증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중생한 사람은 배교할 수 없으니 그들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런 독특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1세는 강력하게 드라이버를 걸고 포고령을 준수하지 않는 1천명을 추방한다.

만약에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가 이런 비슷한 박해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했다. 똑 같은 상황이 그 당시에 벌어졌다. 사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남은 기록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에 가정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러니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청교도들이 왜 주일에 대해 엄격한 견해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에 대해 공감이 갈 것이다. 우리도 만약에 일제 강점기에 그랬다면 강하게 나가서 완강한 주일성수에 대한 견해를 주장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배경속에 당연히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는 안식일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안식일 대한 이야기를 직접 주일로 끌어온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는 수많은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나온다. 그런데 개혁교회에 대표적인 신조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면 주일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안나온다. 결국은 그 시대의 주일성수를 둘러싼 미묘한 그 당시의 역사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장로교가 세워질 때 이런 것들을 전부 다 고려하고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엄격한 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인 조항들이 들어오게 된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성령이 부어지기 전까지는 거의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주일을 지키는 방식이 얼마동안은 유대인으로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의 율법을 따르던 유대인들이 신약의 복음을 깨닫고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세워지기까지 잠정적인 시기였다. 신약시대에도 선지자들이 당분간 유지되었던 것 같이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후 얼마간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던 방식을 주일성수에 적용했는데, 청교도들은 그것을 주일성수에 항구적인 모범이라고 해석하고 이것을 구약 안식일 제도가 가지는 자연법적 질서와 연결 지음으로 자신들의 엄격주의를 정당화했다. 그들이 안식일 제도와 주일 제도 사이에 신학적 연속성을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주일성수에 대한 엄격주의의 원조가 청교도가 아니라 이미 중세시대에 있었다.

청교도들의 주일성수에 대한 엄격주의는 유대인들의 안식일 개념을 율법적으로 적용한 전통으로의 회기한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청교도들의 태도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입장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주일제도사이에 신학적 불연속성을 강조했던 루터나 칼빈과는 달리 연속성을 주장한 조나단 에드워드도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본래 의도했던 목적과 내용이 신약의 주일제도안에서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의 안식일이 그림자라고 보고 진짜 안식일을 통해서 의도하려고 했던 것이 주일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제임스 1세의 스포츠 선언에서 못하게 한 것이 있다. 가학성 스포츠, 짐승들을 창으로 찌르는 것들은 주일하고는 안 맞는다고 해서 못하게 했다. 제임스 1세는 피흘리는 가학성 스포츠가 아닌 한 교인들이 주일예배를 마친 후 얼마든지 스포츠를 즐겨도 된다고 공포했는데, 여기에는 악기연주, 댄싱, 뛰기, 술잔치, 가면무도회까지 확대허용이 되었는데 영국 정부는 엄격한 주일성수는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싫어하게 만들 것이고, 주일에 스포츠와 오락을 허용함으로 국민 건강에 이바지하는 것이 미래에 발생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는 국력을 기르는 길이라는 논리를 폈다. 결국 1618년에 나라전체에 시행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영국 청교도들이 루터보다는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 존 낙스같은 사람은 칼빈에 의해 사사받았던 사람이다. 루터는 기질적으로 스포츠를 좋아했고 사람들에게 권했지만, 칼빈은 천성적으로 샌님 같은 기질이 있어서 스포츠를 취향적으로 안좋아했다. 그랬기에 그러한 칼빈의 특성들이 청교도들에게 전수가 되어서 청교도들을 신체적인 활동에 대해 조심스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왜 그런가하면 육체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죄악시 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에 몰두하게 될 때 인간의 쾌락과 육체의 즐거움에 빠져서 정신이 방탕해져 하나님을 묵상하고 성경에 집중하고 기도하고 이런것들이 흩어져서 불경건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경계 때문에 청교도들이 인간의 스포츠 활동에 대해 경건과 관련하여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스포츠를 통해 체력단련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들이 그런 육체적인 활동을 안해도 약해지는데 정신을 분산시켜서 경건을 흩어놓지 않을까 하는 우려들을 특히 젊은 세대들에 대해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르는데 1625년에 또 다른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주일에 저지러지는 여러 부패한 행동들의 처벌에 대한 법령"을 공포한다. 법령은 뜬금이 없다. 아버지가 공포한 스포츠 선언을 이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제임스 1세가 선언한 것이 너무 많은 자유를 주어서 주일에는 하면 안되는 일까지 한다며, 동물들을 학대하고 격투같은 가학적인 스포츠들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상당히 큰 액수 벌금이 규정되어 있었다. 왜 이 선언이 나왔는가 하면 이때는 의회가 왕당파의 세력이 약해지고 의회파의 세력이 강해졌는데 의회파의 다수를 청교도들이 차지했다. 그래서 국왕에게 압력을 넣어서 아버지 스포cm 선언 폐지는 불가능했고, 이것이라고 발표하게 해서 그래서 더 이상 주일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방지를 한 선언이다.

이런 상황이 될 때 반발하는 사람도 나온다. 당연히 왕당파 윌리암 로드 같은 구교의 사람들이 반발하면서 더 강력하게 선왕의 스포츠 선언을 밀어붙이고 주일에 청교도들의 방식으로 주일이 지켜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맞불을 놓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이 얼마나 그 사이에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겠는가. 청교도들이 양보하게되면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자체를 위협받는 상황이었기에 청교도 입장에서는 양보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종교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은 안식일에 대한 엄청난 연구가 이루어진다. 안식일 제도 속에서 기독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온 인류가 준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연법적이고 일반은총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어떤 인류애적인 자연법적인 규범의 토대를 안식일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니 청교도들은 주일보다는 안식일에 집착해야 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의미를 가졌지만 모든 인류가 그 의미를 아는 것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만 아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은 그리스도 이전에 온 인류와 관계가 된 사안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국가라는 권력이 이런 자연법적이며 창조적인 질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를 강력하게 구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비참한 폐해들을 먼저 겪은 나라가 영국이다. 그런 속에서 영국사람들은 실제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기에 그것은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의 안식일에 대한 자연법적 발상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고민없이 간단하게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판단할 성질이 아니다. 청교도 목회자들은 엄격하게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 뿐 아니라 주일을 지키는 개념을 중심축 자체를 안식일에 놓고 안식일 자체가 온 인류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하나님의 창조적 자연법적 일부라고 보았다. 그들이 이상하게 안식일을 둔 그림자와 실체의 개념을 다른 것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약에서 그림자가 주어지고 그리스도에 와서 실체가 성립되었다고 안보고 오히려 거꾸로 본 것이다.

이 안식일에 이루어질 자연법적 질서는 모든 인류에게 자연법로 적용되어야 할 원리인데, 모든 나라들이 일반법으로라도 주일을 지키게끔 만들어 백성들의 안식시켜야 한다는 것이 청교도들의 생각이었다. 이것에 대한 궁극적인 이상은 종말에나 실현되는데 종말까지 가는 이행의 과정이 주일이라고 보았기에 종교개혁자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점을 이해하고 우리가 어느 부분까지 청교도들을 계승하고 어느 부분을 종교개혁자들의 것들을 계승해야 할 것인가 미묘한 차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부딪치는 성수주일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문제들이다.

오늘날의 주일성수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


제임스 패커의 언급은 굉장히 중요하게 본다. 청교도들은 주일성수 전통을 문자 그대로 우리시대에 적용하려는 방식에 대해 패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우리가 청교도들이 자기 시대의 표현으로 해석했던 4계명의 적용을 우리 자신들에게 엄격하게 부과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를 늘리고 연속시킬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기존의 적용을 물려받으라는 유혹에 저항하고(청교도들이 만들었으니 무조건 이대로 지키면 훌륭한 신앙이고 아니면 날라리 신앙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율법을 우리 자신이 상황에 현실적으로 재적용 하려고 한다면 이 문제를 판단하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어야 하는 원리들이 청교도의 해석에서 비할 수 없이 풍부하고 시사적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즉 패커의 입장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주일을 지켜야 되겠다는 정신자세에 대해서는 배울 점이 많지만 청교도들이 그런 독특한 상황에서 만들어 놓은 독특한 해석의 산물인 여러가지 주일을 지키는 조항들을 시대에 대한 고려없이 우리가 그래도 받아들여서 흉내내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주일성수에 대한 청교도들의 유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 파커의 생각이다. 주일을 지키는 태도와 성수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적인 자세에 대한 경계이다. 첫째,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는 먼저 주일을 지키기 위한 사전적인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은 영혼을 위한 날이고 심령의 일을 위한 날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그 전날 토요일 밤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결정이 된다. 따라서 신자는 토요일 저녁을 주일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구별해 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성수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적인 자세에 대한 경계이다. 파커에 의하면 청교도들은 탁월한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규칙들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이것들을 정죄하는데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성수에 규정을 파쇠하려는 구체적인 노력도 없고, 그렇다고 신약적인 확신도 부족해 보이는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떠 올리게 된다.

우리는 왜 우리의 신앙과 신학에서 우러나오고 우리의 현실에서 고민한 흔적이 뭍어 있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없이, 약 370년전 남의 나라의 신앙고백으로 대신하는가? 당시 사람들 대부분 농경사회에서 살던 사람이고, 우리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지금도 고백의 본질적인 내용에는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시대의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적실성 있게 할 수 없는가? 웨스트민스트 대소요리 문답의 주일성수 규정들을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적용의 고민없이 고수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처럼 주일성수의 의무는 우리와 상관이 없으므로 그것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선언하고 규범없이 살아야 할 것인가?

고백과 현실의 격차에 대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고백에 있어 엄격한 주일성수를 말하며 실제에 있어서는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대해서는 어떤 제재를 가해야 할것인가? 고백과 현실사이에 확대되는 격차 속에서 주일성수의 기준이 자기보다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되는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태도는 방치해도 되는가? 엄격한 주일성수에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과, 주일을 공휴일처럼 지내는 방종한 신도들의 양심가책 없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이런 격차에 대한 현실적인 대처에 대해 의문에 제기된다.

장로교단 노회 당회가 확고히 표명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트 대소요리 문답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교인들을 권징하고 치리하여 성수의 기강을 세우는 것이 어떨 것인가? 그럴수 없다면 용기가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정당성이 확고하지 않기 때문인가? 교회가 주일성수에 대한 사항들을 아디아포라에 지나지 않다고 보고 주일의 거룩함이나 구별됨에 대한 의식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교인들의 태도를 내버려두어야 할 것인가? 이에 주일성수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현실적인 제언을 드린다.

1. 우리 시대의 신앙고백을 작성하자

우리가 따르는 장로교단 헌법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과 대소요리 문답을 제시한다. 이것들이 가지는 탁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오늘 날에도 상당부분의 아디아포라가 포함된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370년 전 왕정정치하에 농업사회인 영국에서 작성된 기존문서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의 역사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결정이다.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소집된 대한예수장로회 1회 노회때 신경과 규칙을 정식으로 채용한 것이 대한예수장로회 최초의 헌장이었고 우리의 생각을 가미해 만든 예배모범이나 주일성수에 대한 기타 조항들이 첨삭을 거치며 개정되어 왔지만 한국교회의 적용되기에는 적실성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한국교회가 초기에는 지식도 충분하지 않고 신학자들도 모자라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신앙기준으로 삼은 유서깊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의 가치는 탁월하지만 18세기 계몽주의, 19세기 자유주의, 20세기 사회주의 제국주의 실존주의 허무주의 해체주의를 지나 오늘날은 포스트모더니즘 정오쯤 와 있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쳐 첨단 미디어 환경속에서 글로벌 시대의 살고 있으며 여러가지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시대의 교회가 자기시대의 언어로 현실과 치열한 고민과 싸움 속에서 자기 입술로 신앙을 고백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신앙적 고백의 큰 틀 안에서 새로운 신앙고백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에 주일성수에 대한 교단적인 합의를 담아내야 한다.

위의 내용은 제가 교단에 올린 헌의문이다. 지금 신학자들도 많이 있으니 모여서 1년이고 2년이고 전반적인 문제-교회정치, 성경, 신조 뿐만 아니라 환경, 역사, 남북분단, 인권, 세계등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 열어놓고 최선을 다해서 성경의 기준과 역사적으로 내려온 정통신학,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혁신학적인 관점에서 우리 시대의 고민들을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를 표명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소 불완전해도 표명하고,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후배 신학자들이 모여서 갱신하고 하는 일을, 독일같이 계속 끓임 없이 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모든 교회들이 표준을 보면서 우리가 지금 어느 시점에 와 있고 어떤 문제들을 고민하고 그리고 어떤 문제들은 우리의 고백과 현실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간격을 어떻게 좁혀갈 것인가 진지한 노력들이 있어야 한다. 옛날 것을 받아놓고 우리는 그것으로 한다. 물론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나 문서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가치의 탁월성에 대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깊이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상황과 고민하면서 다시 우리의 입술로 고백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2. 현실적으로 주일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주일에 무엇을 사먹지 말라', '주일에 무엇을 하지말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지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하는데 교인과 자라나는 세대들이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모른다. 주일하면 학생들은 공차면 안되는 날이고,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물건팔면 안되는 날이고, 모든 개념이 무엇을 못하는 날로만 새겨졌다. 그것은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이다. 주일에 대해서는 안식일만큼도 모른다. 주일의 소중함을 알아야 잘 지킬 텐데 소중한 것을 모르니 잘지킬 수 없다.

청교도들은 강조점을 안식일에 두지만, 우리는 종교개혁자의 지침에 따라 강조점을 주일에 둔다. 그러면 당연히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어려서 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이 주일이 얼마나 소중한 날인가 이해되려면 그리스도가 소중하신 분이라는 것, 그리스도가 소중하신 분이라는 것은 구속사역등이 모두 소중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쳐지고 인식될 때 주일을 잘 지키라고 말할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일을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이 구속사건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안식일에서 그것을 끌어오기 보다는 그것은 바라보아서 여기서 성취된 것이고 안식일이 아닌 주일은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면 주의 시대가 온다. 하나님의 통치아래서 그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한없이 기뻐하는 그러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날이 오는데, 그날에 누릴 영적인 복락을 그림자로서 앞당겨서 선취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 주일이다. 주일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일이 특별히 상징적이 되어서 그 안에서 종말에 누릴 날에 온전한 영육의 안식을 누리면서 그 안에서 한없이 행복해 하는 것이 주일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래서 주일에 신학적인 의미를 잘 가르쳐야 한다.

3.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필요

몇해전에 1920년 새문안교회 당회록을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주일성수를 안하는 교인들을 치리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주일성수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수찬정지등 매주 치리가 이루어진다. 그것을 보면서 교회가 기강을 세우려고 노력했구나 하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치리만을 가지고 안된다는 것이 보여졌다. 새문안교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을 치리해야 하니 어느 시점에 와서 치리를 포기한다. 사람들을 치리하는 것도 튼튼하게 유지되어야 할 훈육의 전통이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주일을 다른 일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주일이 주일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변화없이 치리받을까 무서워서 사먹을 것을 못 사먹고, 무엇을 할 것을 못하는 것으로 교회가 거룩해지지 않는다.

4. 세부적인 고백들을 개인규범화

주일성수에 대한 것은 아디아포라에 관한 사항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칼빈과 나의 생각이다. 커다란 양보할 수 없는 두 원칙은 육체의 노동으로 부터 주일을 쉬자, 우리와 정신과 영혼이 하나님께 집중해서 말씀의 교육을 받고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는 일에 심령을 드리자는 것이다. 나머지는 그 일을 하도록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 주일에 물건을 사는가 아닌가는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1부 예배후 하루종일 쇼핑하고 노래하고 이것은 용인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교인에게 들었던 충격을 받은 이야기가 있다. 자녀가 주일 저녁에 친구들하고 영화구경을 한다고 야단쳤다는 것이다. 왜 영화를 보면 안되는가를 물으니 대답을 못했다. 마음속에 뭔가 우리들이 확연하게 정리하지 않은 많은 생각이 있다. 만약에 딸이 마틴 루터가 나오는 종교영화이면 괜찮냐고 하니 그렇다고 한다.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제안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원리를 따르고 세부적인 고백들을 개인규범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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